고린도전서 강해(17) - 한 몸과 다양한 지체의 조화를 이루는 교회(고전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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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6-04-11 18:23본문
고린도전서 강해(17) - 한 몸과 다양한 지체의 조화를 이루는 교회(고전 12장)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고린도전서는 성령 안에서 성숙되어 가는 성도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컨셉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성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교제하고 연합하며 나누며 참여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 안에서 한 몸된 교회가 어떻게 각 지체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가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성을 하나로 연결되는 곳입니다. 그러한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들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각 지체들이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몸안에서 지체들이 사명과 역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조명하고자 합니다.
1. 성령께서는 몸의 지체인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과거에는 영적으로 어두워 우상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것을 서론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고린도 도시는 우상과 이방 종교가 가득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과거 경험에서는 신전 의식 때에 황홀경에 빠지거나 광란적 종교 행위에 빠져 있었고, 이러한 체험을 일부는 교회로 가져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비한 체험이 많을수록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격한 표현이나 이상 현상이 있으면 성령의 역사라고 여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떠한 힘에 끌려서 종교 생활을 했는데,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신비한 힘으로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주되심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고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존중하며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날마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서 주로 고백되어 지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셧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며”(고전 12:4-6).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라고 하는데, 이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라고 한 것은 한 성령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을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재능을 주셔서 성막을 잘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은사인 선물을 주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게 하셨습니다. 각자의 은사가 틀리기에 다양한 은사가 교회에 있어서, 다양한 섬김과 사역을 통해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구원과 같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통해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 12:5)라고 했습니다. 직임은 사역을 의미합니다. 직임은 은사를 가지고 사역하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직임 즉 사역은 여러 가지입니다. 각자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찬양대나 찬양팀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학교나 학생부, 그리고 청년부를 위해서 섬깁니다. 어떤 분들은 봉사의 사역을 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섬깁니다. 어떤 분들은 예술적인 분야에서 섬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핵심은 이 모든 사역의 포커스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 역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은사를 가지고 섬길 때에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헌신하며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분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은사와 하나된 몸을 가르치면서 흥미롭게도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주, 하나님을 4절에서 6절 까지 언급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를 주시고, 주님은 사역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역의 현장에서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은사의 목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은사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합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 가운데 있으면 드러나는 은사가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은사도 있습니다. 이때 드러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은 자칫하면 은사로 섬기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갖게 하는 사탄의 유혹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를 주신 분에게 우리는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인 것입니다.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성도를 섬기는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는 모두에게 선물을 주셔서 성령이 하시는 사역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자연적인 재능 즉 달란트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신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이 목록은 은사의 전체적인 목록이라기 보다는 대표적인 예를 표시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혜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판단과 방향을 제시하는 은혜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교회를 바르게 이끄는 통찰력인 것입니다.
다른 은사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고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며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인 신앙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를 성령께서 주십니다. 믿음의 은사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담대함입니다. 공동체가 흔들릴 때에, 믿음의 은사를 가진 성도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라는 확심을 가지고 공동체를 붙들어 줍니다. 이는 골리앗 앞에 모두 두려워할 때에 다윗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데 사용하는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능력 행하는 은사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책망하는 말씀의 사역입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와 같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계시 받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입니다.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지, 거짓의 교리를 말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각종 방언의 은사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각종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은사였기에, 그 언어를 통역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은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분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은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하며 시기나 질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하며 우쭐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적 사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은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지체들로 세워집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사도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목적을 설명한 후에, 이제는 그 다양성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한 몸의 원리로 조화를 이루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조화, 즉 코이노니아의 모습을 위하여 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몸에는 손과 발, 눈과 귀와 같이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한 몸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성도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각 지체로서 존재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소중한 교회의 지체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단순한 인간의 모임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님과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13절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교회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된 곳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민족적인 차이고, 종이나 자유자는 신분의 차이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으로 구원받아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교회의 몸으로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상적인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적게 배운 사람을 나누지 말아야 하고,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래 믿음 성도와 새로운 사람을 구분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정치적인 견해로 나누지 말아야 하고, 지역이나 혈연과 같은 배경으로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12:14). 다양한 지체가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지체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 12:15-17).
발과 손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발이 자신은 손보다 못한 것 같아 열등감을 느낍니다. “나는 손처럼 중요하지 않고, 나는 손처럼 눈에 띄지 않아. 그러니 나는 몸에 속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아.” 발이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 열등하거나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 중에서 이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찬양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고, 특별한 은사도 없고... 등 등” 그러면서 나는 교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아. 그렇게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지체가 때로는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몸에는 불필요한 지체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교회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귀와 눈의 비유에서도 귀는 눈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눈이 아무리 중요해도 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눈이 소중한 만큼 귀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비교의 죄를 겨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비교는 두 가지를 낳습니다.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면 낙심합니다. 그런데 남보다 낫다고 느끼면 교만해집니다.
몸에는 손의 역할이 있고, 발의 역할이 있고, 눈과 귀의 역할이 있듯이, 교회에서의 모든 성도는 각자의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 12:17). 온 몸이 눈이거나, 귀가 된다면 그 몸의 기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모두가 강단에 서려고 하거나, 모두가 앞에만 드러나려 하거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섬기려 한다면 교회의 기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누군가는 눈이 되고, 누군가는 귀가 되고, 누군가는 손이나 발이 되어 다양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몸을 세워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대로 각자를 지체대로 몸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에서의 자신의 사역은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사역의 자리, 은사와 섬김은 우연히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 가운데 우리를 부르셔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각자가 맡은 사역이 작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대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자리에 세우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지체들이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때에 조금 실수 할 수 있어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격려하며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3. 교회는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이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 후에 ‘다른 지체들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몸의 비유를 통해서 모든 지체가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지체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세워 가는 몸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특히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라고 했습니다. 눈이 손에게 쓸데 없다 라고 무시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네가 쓸데 없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발이 없다면 머리가 아무리 명령을 해도 움식일 수가 없습니다. 눈이 없다면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이는 약하게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이나 작아 보이는 것이 도리어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눈이나 귀, 손과 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이나 폐, 간이 더 소중할 때가 있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몸이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도리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요긴한 것처럼, 교회에도 눈에 띄지 않는 지체들이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약하고 드러나지 않는 지체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고전 12:23-24). 우리가 연약한 지체를 더 잘 돌보듯이, 교회에서도 연약한 지체를 더욱 잘 돌보아 존귀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에도 눈에 띄는 사역을 감당하는 지체들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차량으로 성도님들을 섬기거나, 사무실에서 재정 사역을 하고, 골방에서 기도로 중보하며, 어려운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 음식을 많들어 섬기기도 하고, 재정이 약한 자를 위해서 재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드러내지 않고 섬기는 분들입니다. 교회의 재정을 위해서 십일조와 선교헌금, 건축헌금을 드러내지 않고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는 한 지체로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몸안에서는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분쟁은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서로 다투고 눈과 귀가 서로 다툽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교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곹옹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기뻐하는 하나되는 공동체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는 사람들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성령께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몸의 지체는 모두가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몸의 지체로서 소중함을 인식하고 다른 지체들을 존중하며 우리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각자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서로를 세워가는 몸의 지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고린도전서는 성령 안에서 성숙되어 가는 성도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컨셉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성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교제하고 연합하며 나누며 참여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 안에서 한 몸된 교회가 어떻게 각 지체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가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성을 하나로 연결되는 곳입니다. 그러한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들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각 지체들이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늘 몸안에서 지체들이 사명과 역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조명하고자 합니다.
1. 성령께서는 몸의 지체인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과거에는 영적으로 어두워 우상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것을 서론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고린도 도시는 우상과 이방 종교가 가득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과거 경험에서는 신전 의식 때에 황홀경에 빠지거나 광란적 종교 행위에 빠져 있었고, 이러한 체험을 일부는 교회로 가져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비한 체험이 많을수록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격한 표현이나 이상 현상이 있으면 성령의 역사라고 여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떠한 힘에 끌려서 종교 생활을 했는데,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신비한 힘으로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주되심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고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존중하며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날마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서 주로 고백되어 지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셧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며”(고전 12:4-6).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라고 하는데, 이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라고 한 것은 한 성령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을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재능을 주셔서 성막을 잘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은사인 선물을 주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게 하셨습니다. 각자의 은사가 틀리기에 다양한 은사가 교회에 있어서, 다양한 섬김과 사역을 통해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구원과 같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통해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 12:5)라고 했습니다. 직임은 사역을 의미합니다. 직임은 은사를 가지고 사역하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직임 즉 사역은 여러 가지입니다. 각자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찬양대나 찬양팀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학교나 학생부, 그리고 청년부를 위해서 섬깁니다. 어떤 분들은 봉사의 사역을 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섬깁니다. 어떤 분들은 예술적인 분야에서 섬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핵심은 이 모든 사역의 포커스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 역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은사를 가지고 섬길 때에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헌신하며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분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은사와 하나된 몸을 가르치면서 흥미롭게도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주, 하나님을 4절에서 6절 까지 언급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를 주시고, 주님은 사역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역의 현장에서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은사의 목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은사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합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 가운데 있으면 드러나는 은사가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은사도 있습니다. 이때 드러나는 은사를 가진 분들은 자칫하면 은사로 섬기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갖게 하는 사탄의 유혹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를 주신 분에게 우리는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인 것입니다.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성도를 섬기는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들에게는 모두에게 선물을 주셔서 성령이 하시는 사역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자연적인 재능 즉 달란트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신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이 목록은 은사의 전체적인 목록이라기 보다는 대표적인 예를 표시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지혜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판단과 방향을 제시하는 은혜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교회를 바르게 이끄는 통찰력인 것입니다.
다른 은사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고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며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인 신앙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를 성령께서 주십니다. 믿음의 은사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담대함입니다. 공동체가 흔들릴 때에, 믿음의 은사를 가진 성도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라는 확심을 가지고 공동체를 붙들어 줍니다. 이는 골리앗 앞에 모두 두려워할 때에 다윗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데 사용하는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능력 행하는 은사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책망하는 말씀의 사역입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와 같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계시 받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는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입니다.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참으로 진리를 말하는지, 거짓의 교리를 말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각종 방언의 은사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각종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은사였기에, 그 언어를 통역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은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분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은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하며 시기나 질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하며 우쭐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적 사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은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지체들로 세워집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사도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목적을 설명한 후에, 이제는 그 다양성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한 몸의 원리로 조화를 이루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조화, 즉 코이노니아의 모습을 위하여 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몸에는 손과 발, 눈과 귀와 같이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한 몸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성도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각 지체로서 존재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소중한 교회의 지체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단순한 인간의 모임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님과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13절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교회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된 곳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민족적인 차이고, 종이나 자유자는 신분의 차이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으로 구원받아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교회의 몸으로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상적인 기준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적게 배운 사람을 나누지 말아야 하고,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래 믿음 성도와 새로운 사람을 구분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정치적인 견해로 나누지 말아야 하고, 지역이나 혈연과 같은 배경으로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12:14). 다양한 지체가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지체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 12:15-17).
발과 손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발이 자신은 손보다 못한 것 같아 열등감을 느낍니다. “나는 손처럼 중요하지 않고, 나는 손처럼 눈에 띄지 않아. 그러니 나는 몸에 속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아.” 발이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 열등하거나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 중에서 이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찬양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고, 특별한 은사도 없고... 등 등” 그러면서 나는 교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아. 그렇게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지체가 때로는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몸에는 불필요한 지체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교회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귀와 눈의 비유에서도 귀는 눈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눈이 아무리 중요해도 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눈이 소중한 만큼 귀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비교의 죄를 겨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비교는 두 가지를 낳습니다.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면 낙심합니다. 그런데 남보다 낫다고 느끼면 교만해집니다.
몸에는 손의 역할이 있고, 발의 역할이 있고, 눈과 귀의 역할이 있듯이, 교회에서의 모든 성도는 각자의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 12:17). 온 몸이 눈이거나, 귀가 된다면 그 몸의 기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모두가 강단에 서려고 하거나, 모두가 앞에만 드러나려 하거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섬기려 한다면 교회의 기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누군가는 눈이 되고, 누군가는 귀가 되고, 누군가는 손이나 발이 되어 다양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몸을 세워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대로 각자를 지체대로 몸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에서의 자신의 사역은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사역의 자리, 은사와 섬김은 우연히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 가운데 우리를 부르셔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각자가 맡은 사역이 작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대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자리에 세우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지체들이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때에 조금 실수 할 수 있어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격려하며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3. 교회는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이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 후에 ‘다른 지체들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몸의 비유를 통해서 모든 지체가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지체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세워 가는 몸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특히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라고 했습니다. 눈이 손에게 쓸데 없다 라고 무시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네가 쓸데 없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발이 없다면 머리가 아무리 명령을 해도 움식일 수가 없습니다. 눈이 없다면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이는 약하게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이나 작아 보이는 것이 도리어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눈이나 귀, 손과 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이나 폐, 간이 더 소중할 때가 있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몸이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도리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요긴한 것처럼, 교회에도 눈에 띄지 않는 지체들이 더욱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약하고 드러나지 않는 지체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고전 12:23-24). 우리가 연약한 지체를 더 잘 돌보듯이, 교회에서도 연약한 지체를 더욱 잘 돌보아 존귀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에도 눈에 띄는 사역을 감당하는 지체들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차량으로 성도님들을 섬기거나, 사무실에서 재정 사역을 하고, 골방에서 기도로 중보하며, 어려운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 음식을 많들어 섬기기도 하고, 재정이 약한 자를 위해서 재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드러내지 않고 섬기는 분들입니다. 교회의 재정을 위해서 십일조와 선교헌금, 건축헌금을 드러내지 않고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는 한 지체로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몸안에서는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분쟁은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서로 다투고 눈과 귀가 서로 다툽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교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곹옹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기뻐하는 하나되는 공동체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는 사람들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성령께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몸의 지체는 모두가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몸의 지체로서 소중함을 인식하고 다른 지체들을 존중하며 우리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각자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서로를 세워가는 몸의 지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