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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아가는 회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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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6-07-1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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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아가는 회복의 길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나를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역대하 36:22-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질 때가 있고, 가정이 흔들릴 때가 있으며,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지만,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와 무거운 짐을 품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예배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읽는 것이 기뻤는데, 어느 순간 예배가 형식이 되고 기도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감동이 없고,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은 외롭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우리 가정이 다시 믿음 위에 설 수 있을까?”
“우리 교회가 다시 뜨겁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이러한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넘어졌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며, 실패했다고 해서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은혜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크게 무너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폐허와 수치뿐이었습니다. 성전은 불탔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예배와 공동체는 흩어졌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신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시작되었습니다.

포로 귀환 시대에 하나님은 세 사람을 특별히 사용하셨습니다.

스룹바벨을 통해 무너진 제단과 성전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에스라를 통해 잊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무너진 성벽과 공동체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이 세 사람의 사역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 회복의 길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예배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삶을 바로 세우십니다. 또한 우리를 혼자 남겨 두지 않으시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워 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다시 세우기 원하시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무너진 예배의 자리입니까? 약해진 말씀과 기도의 자리입니까? 흔들리는 가정과 상처 입은 공동체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보여 주신 회복의 길을 따라 우리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1. 스룹바벨 — 회복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그 위에 드리려 할새” (에스라 3:2)

스룹바벨은 다윗 왕의 혈통에 속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계보에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합니다. 그는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바벨론 포로 이후 첫 번째로 유다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돌아온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성벽도 허물어졌으며,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던 사람들에게 당시의 예루살렘은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과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집을 짓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을 먼저 쌓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 3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스 3:2)

제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제단을 다시 세웠다는 것은 단순히 돌을 쌓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우리가 다시 주님께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삶이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환경이 안정된 후에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다 해결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두렵고 불안하며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어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주변 민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상황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어려울수록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낙심될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삶이 바쁠수록 예배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남는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스룹바벨은 제단을 세운 후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아직 성전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초만 놓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기초가 놓였다는 것은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늘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다시 주일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시작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스가랴 4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스 4:10) 하나님은 작은 순종을 통해 큰 회복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시작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다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스룹바벨의 사역에는 방해도 있었습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대적들이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손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낙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 언제나 방해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배를 회복하려고 하면 바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피곤함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려고 하면 여러 유혹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우리의 회복도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지만으로 신앙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다시 세워 주옵소서.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참된 예배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께서는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세워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2. 에스라 — 회복은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7:10)

스룹바벨이 예배의 제단과 성전의 기초를 세웠다면, 에스라는 말씀으로 백성의 영혼을 다시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이며,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성전 건물은 다시 세워졌지만, 백성들의 신앙은 여전히 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고, 이방 문화와 섞여 살면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 에스라였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율법 학자였습니다. 성경은 그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백성들에게 바르게 가르칠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은 그의 삶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 7:10) 여기에는 에스라의 신앙의 순서가 나타납니다.

첫째, 그는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둘째, 그는 말씀을 준행했습니다.
셋째, 그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에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삶으로 살아 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말과 행동을 바꾸며,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내 뜻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음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 22절)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말씀이 없으면 신앙은 쉽게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말씀이 없으면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지만 말씀이 없으면 사람의 인정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위에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에스라 7:28) 그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했습니다. 에스라의 사역은 말씀 사역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워진 사역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이 내 지식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내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게 하소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심각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멀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까지 그 죄에 앞장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민족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와 가증한 풍습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와 언약의 거룩함을 무너뜨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하나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죄를 보고도 무덤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죄를 슬퍼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삶을 아파할 줄 압니다.

에스라는 백성의 죄를 남의 죄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쳤나이다.” 그는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는 쉽게 보지만 자신의 죄는 잘 보지 못합니다. 교회의 문제와 가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말할 때도 “저 사람 때문에”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은 남을 탓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회복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가정이 회복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먼저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살아나려면 먼저 내 마음이 말씀 앞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울며 기도하자 백성들도 모여 크게 통곡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회개가 공동체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영적 영향력입니다.

내가 말씀 앞에 바로 서면 내 주변에도 은혜의 영향력이 흘러갑니다. 부모가 말씀 앞에 바로 서면 그 영향이 자녀에게 흘러갑니다. 성도가 기도의 자리에 서면 교회 공동체에도 선한 영향이 미칩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게 하나님께 돌아오면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회개는 눈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실제로 죄에서 돌이키게 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에는 눈물이 있지만, 동시에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삶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도 순종하지 않고 있는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 가정과 교회생활에서 바로잡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말씀은 우리를 책망하지만 동시에 소망을 줍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무너졌어도 말씀 앞에 다시 서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3. 느헤미야 — 회복은 공동체를 함께 세울 때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느헤미야 2:17)

세 번째로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이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픔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왕궁에 있으니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받아들였고, 공동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아파하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한 성도가 낙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목회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믿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몇몇 부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일만 중요하고, 내 가정만 중요하며, 내 형편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아픔을 함께 품고, 성도의 눈물을 함께 나누며, 무너진 믿음의 자리를 함께 세워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탓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문제를 분석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했습니다.

왕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느헤미야는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짧은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문제 앞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말하기 전에 기도하고, 교회에서 결정하기 전에 기도하며,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이 찾아올 때도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밤에 조용히 성벽을 살폈습니다. 어디가 무너졌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느헤미야는 “너희가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당한 곤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너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신을 도우셨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일어나 건축하자”고 응답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 2:18) 낙심했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무너진 성벽 앞에서 체념하던 사람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돌만 쌓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만 세운 것이 아니라, 낙심한 백성의 마음도 함께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교회도 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열심만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자기 자리에서 함께 세워 가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로 섬깁니다.
어떤 성도는 찬양으로 섬깁니다.
어떤 성도는 다음 세대를 돌봅니다.
어떤 성도는 낙심한 사람을 위로합니다.
어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충성합니다.

성벽은 한 사람이 모두 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앞에 놓인 무너진 부분을 감당할 때 성벽은 다시 세워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성도가 자기 믿음의 자리와 섬김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지킬 때 공동체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느헤미야의 사역에도 방해가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조롱하고 위협했습니다. 백성들은 지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 (느헤미야 4:14)

느헤미야는 문제를 크게 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두려워집니다. 사람의 말만 들으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성벽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성벽이 무너져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의 성벽이 약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과 다음 세대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사랑과 하나 됨이 무너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느헤미야처럼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낙심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겠지”라고 말하기보다 “하나님, 제가 제 자리에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사역은 성벽 재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 안의 불의도 바로잡았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게 했습니다.

그는 성벽만 세운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사랑과 공의도 세웠습니다. 교회는 건물만 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 곳입니다. 약한 사람이 보호받고, 낙심한 사람이 위로받으며,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세워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께 돌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룹바벨은 무너진 성전과 예배의 제단을 세웠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의 영혼을 세웠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과 공동체를 다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말씀과 공동체를 함께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시대에도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무너진 예배도 다시 세우시며, 식어진 말씀의 사모함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흩어진 공동체도 다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무너졌고, 성벽도 무너졌으며, 신앙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통해 예배의 제단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에스라를 통해 말씀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공동체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만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성벽은 다시 세워졌지만 인간의 죄와 무너진 마음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참된 성전이십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느헤미야가 성벽과 공동체를 세웠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한 몸 된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회복은 단순히 더 열심히 노력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다시 세우기 원하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무너진 예배의 자리입니까? 알고도 순종하지 못한 말씀입니까? 상처 입은 가정과 공동체입니까?

무너진 것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는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스룹바벨처럼 예배의 제단을 다시 세웁시다. 에스라처럼 말씀 앞에 순종합시다. 느헤미야처럼 내가 맡은 자리에서 공동체를 세워 갑시다. 오늘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갑시다.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믿음으로 일어나 함께 세워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