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8) -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입니다 (고전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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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댓글 0건 조회 25회 작성일 26-04-18 21:50본문
고린도전서 (18) -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입니다 (고전 13장)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3장 전체를 사랑이 왜 필요하고,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에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도 있었고 은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은 참된 사랑을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조건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우너합니다.
1.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말이나 믿음이나 지식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사람의 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방언은 헬라어 글로사로서 ’신체에 속한 혀, 또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 또는 방언‘을 의미합니다. 천사의 말은 천사처럼 사용하는 감동적인 말이나 완전한 말을 의미합니다.
즉, 말을 아무리 감동적으로 하거나 완전하게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소음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영적인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우리가 예언하는 능력은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은 성경의 깊은 뜻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많이 나누고 희생하면 훌륭하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을 뿐더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구제와 헌신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무역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였고, 그리스의 영향으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되어 말을 잘하는 문화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말을 잘하는 사람을 인정하거나 지식과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높이여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고, 교만하였고 도덕적인 타락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의 질서가 무너지며 은사를 자신의 트로피처럼 자랑하며 논란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은사나 믿음이나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더욱 큰 은사이며 제일 좋은 길은 바로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믿음이나 은사, 지식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삶의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며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오래 참다의 의미는 분노를 오래 미루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즉시 표현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함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데, 이는 분노를 미루고 대신에 온유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온유는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치밀어 올 때에 분노를 늦추고, 그 대신에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질투하거나 경쟁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경쟁심을 갖지 않습니다. 도리어 격려하며 응원합니다. 사랑은 ‘왜 나는 아니지?’라는 마음을 거부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 자신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있고, 자신의 삶이 있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시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나무의 종류가 각양 각색이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삶도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기를 과시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신에 대하여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자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은 내가 얼마나 대단하다 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세워지느냐 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마음입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항상 마음에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말할 때에 항상 자기 중심이 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불편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교만은 속으로 비교하며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낮게 보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시기 위하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게 했습니다.
네 번째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품위 없이 행동하거나 상대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단순히 버릇 없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의 품위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든, 상대의 품위와 존엄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말로 상처를 주건,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례히 행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를 존중하고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태도를 조심하며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품위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례함의 근본 이유는 자기 중심에 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이 삶의 이유로 찾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사랑은 쉽게 화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다의 의미는 날카롭게 자극하거나 폭발하는 것입니다. 즉, 건드리면 바로 날이 서서 튀어 오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할 수 있어도 그 분노를 폭발시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은 화가 나는 감정이 생기면 그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나쁜 감정에 지배를 당하지 않고, 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서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기억하다는 회계 용어로서 계산하다, 장부에 기록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한 것이나 잘못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과 악한 일을 장부에 기록해서 계속해서 꺼내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며 사랑이 아닌 미움의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기록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에서 지워버립니다. 즉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멀리 옮기셨다“(시 103: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록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놓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고, 우리가 놓아 주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입니다.
여섯 번째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도리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잘못 또는 죄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실패할 때에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이 있다면 이는 사랑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쉽게 불의를 보며 기뻐하곤 합니다. 불의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깨고 하나님과 단절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보고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도리어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의미합니다. 요한3서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3 3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불의를 행하며 먹고 사는 것보다, 진리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가치를 받아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잃어버린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진리와 사랑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같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는 진리 없는 사랑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으로서 진리는 하나다 가 아니라 진리는 개인이 결정한다 라는 인본주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진리를 단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리를 말하면, 이것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서로 인정하며 살아가자고 합니다.
참된 진리는 우리를 잘못된 가치나 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가치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게 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다고 했습니다. 참는 것의 헬라어는 덮는다, 인내한다 라는 두 개의 뜻을 깆고 있습니다. 사랑은 덮는 지붕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랑은 외부에서 오는 험담이나 비난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내적으로 실수나 약점을 함부로 퍼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할 때에 그들을 향한 지붕 역할을 하며 보호합니다. 외부의 상처나 내부의 허물을 퍼트리지 않고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딥니다. 사랑은 그의 미래를 보며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응원하고 실패해도 응원하며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끝까지 버티며 인내합니다. 즉 사랑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끝까지 인내하시며 돌보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가족과 지체들을 향하여 베풀며 격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은 가장 소중하며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0).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후에, 다시 사랑이 영원한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지만,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사도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했습니다. 즉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칩니다. 그리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며 사랑의 은혜를 계속해서 베풀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어린 아이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들이 자기 중심적이고 제한된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이때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사랑의 모습의 십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고 도리어 그 반대로 행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성숙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며 영적 우월감으로 교만해지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모습인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참고 이해하며 세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 우리가 영화로운 자로 변화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우리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기에 흐리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진리나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수 없고,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해서도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하듯이 본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그 때입니다. 그 때에는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며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소망 보다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안에 거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3장 전체를 사랑이 왜 필요하고,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에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도 있었고 은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은 참된 사랑을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조건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우너합니다.
1.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말이나 믿음이나 지식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사람의 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방언은 헬라어 글로사로서 ’신체에 속한 혀, 또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 또는 방언‘을 의미합니다. 천사의 말은 천사처럼 사용하는 감동적인 말이나 완전한 말을 의미합니다.
즉, 말을 아무리 감동적으로 하거나 완전하게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소음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영적인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우리가 예언하는 능력은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은 성경의 깊은 뜻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많이 나누고 희생하면 훌륭하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을 뿐더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구제와 헌신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무역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였고, 그리스의 영향으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되어 말을 잘하는 문화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말을 잘하는 사람을 인정하거나 지식과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높이여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고, 교만하였고 도덕적인 타락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의 질서가 무너지며 은사를 자신의 트로피처럼 자랑하며 논란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은사나 믿음이나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더욱 큰 은사이며 제일 좋은 길은 바로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믿음이나 은사, 지식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삶의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며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오래 참다의 의미는 분노를 오래 미루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즉시 표현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함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데, 이는 분노를 미루고 대신에 온유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온유는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치밀어 올 때에 분노를 늦추고, 그 대신에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질투하거나 경쟁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경쟁심을 갖지 않습니다. 도리어 격려하며 응원합니다. 사랑은 ‘왜 나는 아니지?’라는 마음을 거부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 자신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있고, 자신의 삶이 있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시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나무의 종류가 각양 각색이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삶도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기를 과시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신에 대하여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자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은 내가 얼마나 대단하다 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세워지느냐 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마음입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항상 마음에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말할 때에 항상 자기 중심이 되고, 인정받지 못하면 불편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교만은 속으로 비교하며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낮게 보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시기 위하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게 했습니다.
네 번째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품위 없이 행동하거나 상대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단순히 버릇 없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의 품위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든, 상대의 품위와 존엄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말로 상처를 주건,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례히 행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를 존중하고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태도를 조심하며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품위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를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례함의 근본 이유는 자기 중심에 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이 삶의 이유로 찾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사랑은 쉽게 화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다의 의미는 날카롭게 자극하거나 폭발하는 것입니다. 즉, 건드리면 바로 날이 서서 튀어 오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할 수 있어도 그 분노를 폭발시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은 화가 나는 감정이 생기면 그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나쁜 감정에 지배를 당하지 않고, 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서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기억하다는 회계 용어로서 계산하다, 장부에 기록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한 것이나 잘못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과 악한 일을 장부에 기록해서 계속해서 꺼내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며 사랑이 아닌 미움의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기록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에서 지워버립니다. 즉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멀리 옮기셨다“(시 103: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록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놓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고, 우리가 놓아 주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입니다.
여섯 번째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도리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잘못 또는 죄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실패할 때에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이 있다면 이는 사랑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쉽게 불의를 보며 기뻐하곤 합니다. 불의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깨고 하나님과 단절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보고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도리어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의미합니다. 요한3서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3 3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불의를 행하며 먹고 사는 것보다, 진리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가치를 받아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잃어버린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진리와 사랑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같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는 진리 없는 사랑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으로서 진리는 하나다 가 아니라 진리는 개인이 결정한다 라는 인본주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진리를 단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리를 말하면, 이것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서로 인정하며 살아가자고 합니다.
참된 진리는 우리를 잘못된 가치나 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가치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게 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다고 했습니다. 참는 것의 헬라어는 덮는다, 인내한다 라는 두 개의 뜻을 깆고 있습니다. 사랑은 덮는 지붕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랑은 외부에서 오는 험담이나 비난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내적으로 실수나 약점을 함부로 퍼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할 때에 그들을 향한 지붕 역할을 하며 보호합니다. 외부의 상처나 내부의 허물을 퍼트리지 않고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딥니다. 사랑은 그의 미래를 보며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응원하고 실패해도 응원하며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끝까지 버티며 인내합니다. 즉 사랑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끝까지 인내하시며 돌보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가족과 지체들을 향하여 베풀며 격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은 가장 소중하며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0).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후에, 다시 사랑이 영원한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지만,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사도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했습니다. 즉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칩니다. 그리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면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며 사랑의 은혜를 계속해서 베풀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어린 아이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들이 자기 중심적이고 제한된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이때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사랑의 모습의 십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고 도리어 그 반대로 행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성숙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며 영적 우월감으로 교만해지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모습인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참고 이해하며 세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 우리가 영화로운 자로 변화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우리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기에 흐리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진리나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수 없고,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해서도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하듯이 본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그 때입니다. 그 때에는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며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소망 보다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안에 거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